19~20세기 한말 격동기에 이항로의 화서(華西)학파, 기정진의 노사(蘆沙)학파, 전우의 간재(艮齋)학파, 송병선-송병순의 연재(淵齋)-심석재(心石齋)학파, 박세화의 의당(毅堂)학파 등 5대 기호(畿湖)학파가 활동했다.
특히 제천은 의당학파의 본고장으로 의당 박세화 선생과 그의 문인들이 활동한 지역이다.
매년 제향뿐만 아니라 의당 박세화의 사상과 병산영당을 재조명하는 활동들이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으나 지역민들은 존재조차 모르거나 이름만 알고 있는 실정이다.
붓을 놓고, 殉道(순도)의 길을 걸은 의당 박세화와 병산영당의 간략한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병산영당 변천사
병산영당은 의당 박세화 선생이 1906년 덕산면 억수리에 용하구곡의 이름을 따서 용화영당을 건립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소실되자 1951년 청풍면 장선리 병산골에 박세화 선생의 제자들이 병산영당을 건립했다.
시간이 흘러 건물이 퇴락하고 충주~금성 간 도로 개설로 철거가 불가피해 1994년 박세화 선생의 제자인 양암 유지혁 선생의 서재였던 현재의 장소인 금성면 사곡리에 터를 기증하고 영당을 신축했다.
병산영당 제향은 주자, 우암 송시열, 의당 박세화, 회당 윤응선, 직당 신현국, 사암 안재극, 확재 이원우, 해산재 양재명, 양암 유지혁 등 아홉 분의 위폐를 모시고 매년 음력 3월 15일과 음력 9월 15일에 두 차례 거행된다.
의당학파의 강회(講會)는 현재의 학술세미나처럼 정립되지 않은 부분의 집중적인 학습과 의견 교환, 학파의 질서와 단결을 모색하는 자리로 매년 제향과 같은 날에 열렸다.
◇의당 박세화의 사상과 병산영당 재조명
의당 박세화 선생의 사상과 병산영당 역사를 재조명하는 연구와 학술 세미나, 기획 전시회, 서적 발간 등이 활발이 펼쳐지고 있다.
병산영당은 지난 2014년(‘의당 박세화 선생의 학문 세계와 병산영당’), 2015년(‘의당 박세화와 의당학’), 2016년(한말 의당학파의 학맥과 전개) 등 의당 박세화 선생 학술 세미나를 매년 개최하고 있으며, 제천문화원(원장 이해권)은 지난해 광복 71주년을 맞아 제5회 의병 유품 전시회를 ‘붓을 놓고, 殉道(순도)의 길을 가다’란 주제로 ‘의당 박세화 선생 특별전’을 개최했다.
2014년 세명대 김종수 교수가 의당 박세화 선생의 단식 순도 일기 ‘창동일기(昌東日記)’를 번역, 출간했으며 지난 1월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제319회 월례 연구발표회에서도 의당 박세화의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이란 주제로 발표와 토론이 있었다.
◇의당 박세화 선생
의당 박세화(1834~1910년) 선생은 월악산 용하동에서 용하영당(用夏影堂, 후칭 병산영당)을 창건하고 제천에서 20여년 동안 많은 문도를 지도했다.
선생은 1905년 춘추대의(春秋大義) 정신으로 월악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8개월간 일제 한성사령부에 연행돼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글 읽은 선비로 책임을 통감한다”며 23일간 절식(絶食) 끝에 순국(殉國)한 선비정신의 표상이고, 한말의 대학자이다.
◇의당 박세화의 마지막 유묵
단식 6일째 의당 박세화 선생은 제자들의 슬픔에 예의조선(禮義朝鮮) 4대자를 써서 의당학파가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절명시(목숨이 끊어지기 직전 지은 시)를 남긴다.
예의조선(禮義朝鮮) 예와 의가 살아있는 조선이 되자
절명시(絶命詩)[五言絶句]
道亡吾奈何 도가 망했는데 내 어찌해야 하는가
仰天一慟哭 하늘을 우러러보고 한바탕 크게 통곡 하노라
自靖獻聖賢 자정하여 성현께 내 몸을 바치니
嗚呼君莫惑 오호라 그대는 미혹되지 말지어다. *역해:안광영(安光榮 : 병산영당 도유사)
마지막으로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는 처칠의 말처럼 한말 기호 유림에 큰 족적을 남긴 의당 박세화와 병산영당의 역사를 되짚어보며 시대정신이 무엇인지를 한번쯤 곱씹어볼 시기다.
(제천또바기뉴스=이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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