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상념 / 최복희
젖은 호숫가에 차곡차곡 쌓여 앉는 이슬비에 튕겨 저 올라오는 무성한 잡초가 장마를 실감 나게 하는 일요일, 박달재가 있는 시랑산 계곡 한 귀퉁이를 찾아 검푸르게 익어가는 여름을 확인하러 갔다.
돌이끼 융단처럼 빛나는 계곡을 접어들자 날개 접은 이슬비가 함초롬히 젖어 있는 갈나무 잎새 끝에 순연한 물방울 하나 매달아 놓고 있다. 김치 냄새에 젖어 있는 냉장고에 갈잎을 따다 넣어야 한다며 갈잎 따러 올라가는 동네 어르신을, 뒤 쳐져서 배웅하고, 초록빛 녹음 우거진 숲 속에 저 홀로 은빛날개 달아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
나뭇잎이 일렁이는 대로 눈높이를 맞추어 보니 참 신기하게도 물방울 하나하나에 작은 소우주가 달려있다. 숲 속의 나무를 매달기도 하고 앞산의 밤나무를 매달기도 하고 그러다가 산 하나를 다 엮어서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 속의 수채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다 문득 내 유년의 한 토막 속으로 젖어든다.
교통수단이라고는 하루에 두어 번이나 다닐까, 빨간 베레모에 검정 ‘우와파리’를 입은 안내양이 버스 문에 올라타며 “오라 ~잇 ~”을 하면 꽁무니에 시커먼 매연을 뿡뿡 뿜으며 출발하던, 앞머리가 불뚝 튀어나온 하얀색 강원여객버스가 전부였던 시절, 버스는 엄두도 못 내고 걸어서 등 하교를 하느라 여름이면 땀에 절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기도 하고, 겨울이면 손 발이 얼어 동상에 걸려 발가락이 말갛게 부풀어 오르기도 하였던가.
그뿐인가 학교에서 집까지 십 오리 길을 다니다 보면 먼지 뽀얗게 이는 신작로에 비가 오면 흙탕물이 튕겨 차만 오면 물을 피해 도망을 다니던가 아니면, 비닐우산으로 몸을 가리며 걸어 다니기도 하였는데 어느 하루는 우산도 없이 소나기를 만났다.
왕박산을 넘어온 먹장구름이 한줄기 소나기를 힘차게 뿌리는가 싶었는데 뙤약볕에 알맞게 데워진 빗물이, 내 얼굴 위로 줄줄이 흘러내려 어느새 땟국 흐르던 얼룩 진 얼굴을 말갛게 씻어주기 시작했다. 따듯한 빗물 샤워를 하다 보니 어깨에 둘러멘 보자기 속의 책은 이미 떡 덩어리가 된 지 오래 건 만 등줄기로 흘러내리는 장대비가 엄마의 품속 같은 안온한 감촉에 얼마나 행복해했던…
대기의 따가운 온도에 데워진 빗물이 마치 샤워기에서 알맞게 데워져 나오는 온수에 다름 아니었다. 그럴 때 내 알몸을 달라붙어 있는 옷의 거추장스러움 이라니…
그 순간은 엉덩이를 거쳐 종아리에 감겨 드는 나일론 옷을 훌훌 벗어던져버리고 자연과 합일된 내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육중한 몸으로 진저리를 치며 빗물을 털어내는 왕방울 큰 눈을 껌벅이던 어미소처럼 나는 턱으로 방울방울 흐르는 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제발 이 비가 그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비는 그렇게 포근한 엄마의 모습으로 내게 왔다.
오늘은 내리는 비를 두 손으로 받아 안고 싶다.
잎새 무성한 갈잎에서 뚝뚝 떨궈내는 빗방울의 아릿함이 도시의 이방인에게 짜르르한 슬픔으로 전이되어 온다. 문득 세속의 찌든 때 속에 젖어있는 누군가를 깨우고 싶어 진다. 그래서 함께 비를 바라보며 새끼줄에 내 유년을 엮어보고 싶다. 가지런한 빗금 사이를 뚫고 장애물 경기를 하는 아이가 되고 싶다.
저 멀리에서 삼각 깃발을 들고 서 있는 선생님 앞으로 달려가 팔목에 1등짜리 도장하나 받아 의기양양 늙은 노모에게 달려가고 싶다.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가신 울 엄마,
비닐우산 하나 겨드랑이에 끼고 당신은 함초롬이 비를 맞고 서서 달려오는 딸애를 방그레 웃으며 맞아 주겠지.빗금을 그으며 사선으로 떨어져 내리는 빗줄기가 이 밤의 나를 깨어있게 하듯이 나도 누군가를 깨어있게 하고 싶다.
내일도 비가 오면 아들을 마중하러 가야겠다,
훌쩍 성장해서 직장을 다니지만 가끔 아주 가끔은 내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우산 하나 받쳐 들고 무심한 퇴근길을 마중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