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문화원(원장 윤종섭)은 제천 독립운동 항일유적지를 알리기 위해 유적지 표지판 2개소를 설치했다.
제천 지역의 독립 만세 운동은 충북에서 4.17~4.19일 시간상 가장 뒤 늦게 펼쳐졌으나 사상자나 체포된 인사를 보면 가장 치열했다. 4.17일 제천 장날 1천여 명의 군중은 미리 제작 배포한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등 다른 어느 지역보다 격렬하게 일제의 국권 침탈에 저항하였다. 그 결과 통계에 따르면 제천은 사망 40명, 피상 92명, 피수 48명을 기록한 피해를 보았다.
충북지역은 3.1만세운동 당시 이를 이끌었던 민족대표 33인 중 6명의 인사가 포함되어 있었고 비록 다른 지역보다 발발 시점이 다소 늦었으나 4월 중순까지 지속해서 당시 충북의 10개군 전역에서 격렬히 진행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를 선양하고 기념하는 사업을 도내 최초로 한 곳은 제천문화원이다.
제천문화원은 “105년 전 일본은 조선 민족 전체를 총과 칼끝으로 주무르려 하였고, 이에 맞서는 의병항쟁 과정에서 제천은 참혹한 피해를 보았다. 특히 제천을 찾았던 매켄지의 설명에 따르면 ‘제천은 지도에서 사라졌다’라고 할 만큼 중심부가 초토화되었다. 또한 제천은 1919년 4월 17일부터 19일까지 3.1만세운동을 했다.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장터, 태극기를 제작하던 장소인 용바위, 젊은 층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이끌어간 동명초등학교, 독립 만세운동의 주역 애국열사 이범우 선생이 있지만 이를 기억하고 기록한 독립운동 항쟁 표지판이 하나도 없다”며 “제천 항일운동의 현장을 알리고자 2024년도부터 항일운동 유적 표지판 설치 사업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이후에 문헌과 현장 조사를 통해 관내 항일 유적지를 파악했고, 그중 항일유적에 남겨진 선열들의 고귀한 정신을 전파하고 자긍심을 강화할 수 있도록 접근성이 좋은 현 제천예술의전당(젊은층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이끌어간 제천공립보통학교 터)과 현 중앙파출소(일제강점기 만세운동을 벌였던 제천경찰서 터)에 독립운동 유적지 표지판을 설치했다고 경과를 설명했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이끌어간 제천공립보통학교
첫 번째 독립운동 항일유적지는 제천공립보통학교 터(堤川公立普通學校 址)로 제천동명초등학교의 전신인 제천공립보통학교가 있던 곳이다. 현재는 예술의전당이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 1919년 3.1운동이 시작되자 4월 16일 제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거나 중퇴한 사람들이 제천 장날인 이튿날에 독립 만세를 외칠 준비를 하였다. 이들은 태극기 천여 매를 만들어 놓았으나 일제에 발각되어 장용근(張用根) 등 12명이 체포되었으며, 모두 10대 후반에서 20대 젊은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같은 해 5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이후 장용근은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장용근은 법정에서 ‘정의(正義)와 인도(人)의 정신에 기초하여 조선 사람으로서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자 했다. 이처럼 제천의 독립 만세운동은 근대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젊은이들이 앞장서 이루어졌다.
이후에도 항일독립을 위한 청년들의 행동은 계속됐다. 1920년 제천공립보통학교에서 제천의 교육·문화·사회운동을 위해 설립된 제천청년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1926년 학교 학생들이 순종 황제의 승하(昇遐)에 대한 일본인 교장의 무례한 언동과 고압적이고 비교육적인 처사에 대한 불만으로, 학교 수업을 거부하는 항의행동인 동맹 휴학을 일으켰다. 일제에 대항하는 민족적 성격을 띤 맹휴 투쟁(盟休鬪爭)이었다.
■일제강점기 만세운동을 벌였던
제천경찰서(현 중앙파출소)
두 번째 독립운동 항일 유적지는 일제강점기 제천경찰서 터(日帝强占期堤川警察署 址)로 일제강점기 제천경찰서가 있던 장소이다. 현재는 중앙파출소로 시민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
1919년 4월 17일 제천시장에서 독립 만세운동을 벌이던 군중이 이동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4월 17일 제천시장에서도 천여 명의 군중이 독립 만세운동을 시작군중이 제천경찰서로 향하자 일본 군경이 군중을 향해 총을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시위를 이끌던 이범우(李範1892~1971)와 그의 동료들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만세운동으로 4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6명이 징역형을 받았다.
이범우는 징역 10월형, 이기하 8월형, 권종필 8월형, 전필현 9월형, 최종률 8월형, 장용근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이범우는 출소 후 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모의를 하다 다시 옥고를 치렀다. 제천의 3.1운동은 천여 명이 참여한 만세운동이었으며 영월 등 영서 지역의 3.1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윤종섭 문화원장은 “105년 전 일본은 조선 민족 전체를 총과 칼끝으로 주무르려 하였고, 이에 맞서는 의병항쟁 과정에서 제천은 참혹한 피해를 보았다”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그러면서 “이를 기억하고 기록한 독립 운동 항쟁 안내판이 하나도 없어 항상 아쉬웠다”고 소회했다.
윤 원장은 “그동안 유적지 표지판 설치를 위해 노력했지만 녹록지 않았다. 올해 유적지 중 두 곳에 유적지 표시판을 설치할 수 있어 기쁘다”며 “앞으로도 4.17만세 운동의 역사적 현장에 독립운동 유적표지판을 설치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의지를 드러냈다.
끝으로 “제천은 1919년 4월 17일 제천 장날 1천여 명의 군중은 미리 제작 배포한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등 다른 어느 지역보다 격렬하게 일제의 국권 침탈에 저항했다. 이처럼 제천은 ‘역사성’을 가진 ‘호국정신의 성지’이다. 제천은 충절의 고장이며, 항일투쟁의 횃불을 든 곳”이라며 ‘항일무장 투쟁의 선봉에 선 제천의 영웅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해 제천학을 통한 ‘제천성’을 찾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특히 의병이 결의한 곳으로 시민들과 청소년들에게 제천의 위대함을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제천문화원은 1919년 그날의 하나 된 외침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2025년 제천 4.17만세운동 행사 시 항일 표지판이 설치된 독립 운동 유적지 2곳을 찾을 예정이다.
(제천또바기뉴스=이호영기자)
대한독립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