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영당(도유사 안광영)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에 글을 읽은 선비로 책임을 통감한다며 23일의 단식 투쟁 끝에 순국했던 의당 박세화(1834~1910) 선생과 그의 문인들을 추모하는 추계 제향을 10월 31일(음력 9월 15일) 거행했다.
병산영당 제향은 주자, 우암 송시열, 의당 박세화, 회당 윤응선, 직당 신현국, 사암 안재극, 확재 이원우, 해산재 양재명, 양암 유지혁 아홉 분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봄(음 3월 15일)과 가을(음 9월 15일) 두 차례 걸쳐 봉행되고 있다.
의당 박세화 선생의 제자 양암 유지혁에게 바윗돌 위에 올라가 글을 배운 안광영 도유사는 제향 참석자 및 주소를 도기(到記)하고 참여하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았으며, 도기를 마친 참석자들은 도포를 입고 갓과 유건을 쓰고 곧 거행될 춘계 제향을 경건한 마음으로 준비했다.
오전 11시 전통제례 방식으로 진행된 제향은 병산영당 양승운 수석장의가 집례(執禮)를 맡아 홀기(笏記 제례의 진행을 적은 문서)를 읽으며 시작됐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초헌관(初獻官) 안광영 도유사, 차헌관(次獻官) 원광대 정경훈 교수가 헌작을 이었다.
정경훈 교수는 ‘용하구곡, 의당 박세화의 사유 공간’ 해제, 창동일기 번역, 병산영당 세미나 논문 발표 등 의당 박세화의 학문세계 연구의 권위자이다.
이 밖에도 후손 및 지역 인사 10여 명이 참석해 그 뜻을 기렸다.
안광영 도유사는 “도유사를 맡아 병산영당을 관리 수호한 지 36년이 되었다. 스승님 앞에 잔을 올리는 것이 예이나 방문하는 손님을 먼저 예우하는 게 도리라는 생각에 한 번도 초헌관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항상 죄송한 마음으로 살았다”며 “코로나로 제첩도 내지 않고 외부 사람들 참석을 자제 해달라 하고 관내 최소 인원으로 제향을 올리다 보니 내 차례가 왔다”고 밝혔다.
그려면서 “80이 넘으니 오늘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스승님과 선인들에게 초헌관으로 예를 올리니 할 도리를 이제 다한 것 같다”고 전해 참석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한편 병산영당은 의당 박세화 선생이 1906년 용하구곡이 있는 덕산면 억수리에 용하영당을 건립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소실되자 1951년 청풍면 장선리 병산골에 문인들이 병산영당을 건립했다. 시간이 흘러 건물이 퇴락하고 교통 불편까지 겹쳐 1994년 안광영 도유사가 현재의 장소인 금성면 사곡리에 영당을 신축했다.
(제천또바기뉴스=이호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