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2월 14일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쵸콜릿을 전해주는 발렌타인데이이고 안중근 의사(1879~1910)의 ‘사형선고일’이기도 하다.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뤼순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정에서 재판장 마나베 주조(眞鍋十藏)는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피고 안중근은 사형에 처한다”

안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사형 집행 전 두 동생과 빌렘 신부에게 “내가 죽은 뒤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옮겨다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안 의사의 유해를 찾을 수 없고 효창원에는 빈묘로 모시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쵸코렛을 선물하는 것도 좋지만 목숨을 바쳐 조국 독립에 헌신한 항일 독립 운동가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뜻을 생각해 보는것은 어떨까?

거사를 위해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이 ‘장부가(丈夫歌)’를 짓고 우덕순 의사가 ‘의거가’로 화답하는 형식으로 거사의 결의를 거듭 다진 장부가(丈夫歌)’를 올립니다.

장부가(丈夫歌)’ /안중근의사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천하를 크게 바라봄이여 어느 날에 업을 이룰꼬
동풍이 점점 차가워짐이여 장사의 의기는 뜨겁도다
분개함이 한번 뻗치니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도적 쥐 이등이여 그 목숨 어찌 사람목숨인고
어찌 이에 이를 줄 알았으리요 사세가 고연하도다
동포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안중근(安重根) 의사

안 의사는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청년기에는 말타기와 사냥에 능했다. 우덕순(禹德淳)의사와 함께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과 동문수학하기도 했다.

1895년 카톨릭에 입교하고 신식 학문을 접했다. 1906년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우고 인재양성에 힘썼다.

1907년부터 의병운동에 참여해 연해주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으로 활동했다.

1908년 제천출신 의병대장 의암 류인석으로부터 독립특파대장의 직함을 받는다.

1909년 동지 11명과 손가락을 끊고 구국투쟁을 맹세했다. 그해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하얼빈에 도착하자 안 의사는 이토를 사살하고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돼 일본 관헌에 넘겨진다.

이듬해 2월 14일 사형이 선고되고 3월 26일 이 의사는 32세의 짧은 일기를 끝으로 처형당한다. 옥중에서 자서전(안응칠 역사)과 미완의 ‘동양평화론’, 붓글씨 200여점을 남겼다.

안 의사의 유해가 매장된 것으로 알려진 ‘뤼순감옥 공공묘지’는 잡목이 우거진 나지막한 야산이다. 1907년부터 1942년까지 뤼순감옥에서 죽은 대부분의 수형자가 이곳에 묻혔다. 주변 지역 개발이 가속화되면서 유해 발굴이 시급한 상황이다.

안 의사 가묘는 용산구 효창공원 내 삼의사(이봉창·윤봉길·백정기) 묘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지난 1946년 백범 김구 선생 주도로 조성됐다. 묘단 아래에는 ‘유방백세(遺芳百世·꽃다운 이름이 후세에 길이 남다)’라는 네 글자를 새겨 넣었다.

(제천또바기뉴스=이호영기자)
(사진=안중근의사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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